난 여행이 참 좋다
대기업에 취직하고 싶지도, 기성세대가 규정한 삶의 태도를 수용할 생각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대학에 가기 원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괜찮은 사람들과 어울려 미친 짓을 좀 본격적으로 해 보고 싶어서. Crazy Stuffs를 한국말로 옮기자니 어감이 좀 그렇긴 한데, 뭐 요점은 그거다. 괜찮은 사람들 사이에서 에너지를 주고받는 것. 이미 학위 자체의 경쟁력과 가치가 떨어져 가는 상황이지만, 대학이라는 울타리로 뭉친 사람들의 그룹 안에서 끌어낼 수 있는 다른 것들은 충분히 많다고 본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런 거다. 대학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전 세계에서 날아온 재밌는 사람들이 계급장 떼고 같은 도미토리에서 자고, 밥을 먹으러 나가고, 강물에 뛰어들어 수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8일이라는 그리 짧지도, 길지도 않았던 여행의 기간 동안 만났던 친구들의 직업군은 대단하리만치 다양했고 그들의 이야기 또한 아주 흥미로웠다. 여행가, 블로거, 사진작가, 의사, 아트스쿨의 선생님, 화장품 회사 사장, 모델, 대학생, 디자이너, 개발자 등등. 소셜 미디어를 통해 언제나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고, 언제든 그들이 내가 사는 곳에 놀러 오면 가이드가 되어주기도 하고, 각자의 사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인맥”은 이런 것들이 아닐까. 전통적으로 귀족들은 사교클럽에 나가서 그들이 원하는 사람들을 사귀고, 정치적으로 서로를 이용하거나 자식들끼리 결혼을 시키기도 하면서, 소위 말하는 파워를 이어나갔다. 배낭여행은 가면을 벗고 만나는 사교클럽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친구가 되고 또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다. 그것도 그리 비싸지 않은 비용과, 길지 않은 기간 안에 말이다.
물론, 여행을 통해 잘 이용해 먹을 사람을 찾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다만, 정보화와 다양성의 시대인 지금은 알고 있는 사람들의 범위를 늘려놓는 것이 아주 큰 강점으로 작용한다는 것만은 확실히 해 두고 싶다. 전통적인 학위와 서류로 증명하는 능력이 무너져가고 있는 이 시대에는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을 가지고 있는 것 그 자체가 힘이고 실력이다. 무엇을 알고 있는지보다 그 지식을 어떤 사람들과 나누고, 그들과 어떤 일을 도모해낼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얼마 전에 쓴 에세이 – [세상의 끝, 그 밖을 향하여]에서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이제는 직업의 경계마저도 허물어지고 있다. 남는 방 하나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게스트하우스의 사장이 될 수도 있고, 자동차만 있으면 택시기사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책 속에는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언제든 써먹을 수 있는 불변의 지식이 들어있기도 하지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체되어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험과 이야기는 책 보다 소셜 미디어, 온라인 에세이, 메신저 등을 통해 더욱 활발하고 빠르게 전달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세상에서 단절되어있다는 이야기는 도태되고 있다는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역사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국경에 접한 도시나 여러 교역로의 중심이 되는 곳은 언제나 경제적으로 부유해졌고 발전된 문명을 가지게 됐다. 로마가 가졌던 힘의 주축인 실크로드, 그리고 중국의 도시 중 가장 먼저 문호를 개방한 상하이가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라는 것은 이 명제를 증명할 수 있는 아주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사람의 경우에도 이 명제가 그대로 적용된다고 본다.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한다는 것은 다양한 아이디어와 지식들을 나누고 습득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며, 본인이 지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가지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금수저 불패론이 나오는 이유가 실패와 도전의 가능성이 넓게 열려있다는 점인 것을 보면, 살아있는 지식과 소통이라는 것은 어쩌면 돈보다 더 강력한 무기일지도 모른다.
나 또한 배낭여행을 하던 중에 홍콩의 한 예술학교로부터 청강생으로 수업을 들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기도 했고, 몇 번인가의 강연 자리에 연사로 서기도 했다. 또, 며칠 만에 가지고 있던 엽서가 모두 팔리는 일도, 꽤나 큰 지원금을 받은 일도 있었다. 모두 다 여행을 다니며 만났던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난 일들이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 세상은 사람으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난다. 사람 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배낭여행의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설명하기는 했지만, 다른 것을 다 제쳐놓고서라도 여행은 그 자체로 아주 흥미로운 활동이다. 새로운 것을 보기도 하고, 익숙하지만 다른 것들에 신기함을 느끼기도 하고, 이전에 생각해보지 못했던 사실들과 알지 못했던 삶의 모습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가끔은 그곳에 사는 사람과 오후를 같이 보내기도 하고, 그들에 집에 초대받아 그들이 매일 먹는 음식을 같이 나누기도 한다.
게스트하우스 매니저 시절에 만난 50년차 배낭여행자, 프렌치 슈퍼 올드 레이디:D
링크- 시간여행자 할머니 이야기
책도 좋지만, 여행은 더 좋은 것 같다. 삶의 전반적인 영역을 가지고 임하는 훈련과 같달까? 비행기표를 구하고 길을 찾는 것에서부터, 안 통하는 말을 제쳐놓고 손짓 발짓을 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제한된 예산을 가지고 최대의 재미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도 하며 이전보다 더 나아진 사람이 되어 돌아오게 되곤 한다. 세 달간의 그리 길지 않은 여행이었지만, 그 전과 이후의 삶, 그리고 나의 태도와 실력이 이전과 같지 않음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자신 있게 여행을 권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제대로 된 여행을 잠시 멈추고, 제주에서 집을 구해 지내며 여행하는 듯하면서도 멈춰있는 듯한 애매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다음 목적지를 향한 탐험을 시작할 생각이다. 책에서,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과, 이곳에 머무르기만 한다면 절대 만날 수 없을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나의 삶을 풍성하게 채워가다 보면 백발이 성한 70대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젊은 친구들과 조금 더 재밌게 소통할 수 있는 이야기보따리 할배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할아버지가 20대 때 여행을 했는데 말이야 그때는 이랬단다.. 하면서:D